박인혁

운율의 하양
Le rythme de la blancheur

2020. 11. 5 – 12. 5
Gallery Woong, Seoul

The Rhythm of Whiteness

최근 박인혁은 새로운 연작에 착수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진 흰색의 주름진 천들을 마치 회화 작품의 느낌으로 선보이는 것이다. 일단 작가가 원하는 상태가 완성되면 백색의 천들을 딱딱하게 굳히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 결과 생성되는 섬세한 형태의 소용돌이, 무수히 많은 주름과 구김이 캔버스의 표면을 마치 구겨진 종이와도 같은 상태로 조형하게 된다. 최소한의 주름조차 제거한 다른 작업들은 어떤 모티브도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모습을 갖게 된다. 무광택의 백색이 빛의 작용으로 드러나는 재료의 변주를 더욱 강조하게 되는 이 작품들은 모노크롬 연구에 가까워 보인다.

각 작품의 구성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어떤 에너지의 측면을 드러낸다. 시선이 작품 위에 멎으면, 일종의 시각적 소란을 만나게 됨과 동시에 관조적인 감상으로 이끄는 침묵 또한 마주하게 된다. 두 개의 상반되는 충동이 같은 공간 안에 공생하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 주름이 없는 작품들의 경우엔 덜 느껴질지 몰라도 – 풍성하고 너그럽다. 작품의 에너지, 나아가 그 격렬함이, 이 동결된 표면의 변화무쌍한 성질로부터 분출된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촉발된 격동과 총체적 혼란의 인상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이 에너지는 마치 억제된 것처럼, 거의 정지 상태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품의 작업이 날아오를 것 같은 천을 석고로 굳히는 과정이라는 걸 감안할 때, 엄밀하게 말하면 정지 상태인 것은 사실이다. 이 작품의 하양blancheur이 보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대리석 조각상의 조각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러한 억제의 느낌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 표면의 잔물결처럼, 움직여야만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돌이킬 수 없이 마비된 상태인 이 작품의 형상들을 바라보는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에너지는 모호하다. 왜냐하면 정신적 시선으로 볼 때 그러한 모순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에너지는 결과적으로 운율의 느낌을 만들어낸다. 박인혁의 작품 세계에서는 적어도 3가지 유형의 행위를 통해 이 운율의 느낌이 더욱 강조된다.

첫째로, 수평에서 수직으로 옮겨가는 행위가 운율을 강조한다. 겉보기엔 단순한 행위이지만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동작이 회화를 조각에 접합시키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들은 천 직물이 붓과 물감을 대신하고 있어서 이것이 회화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벽에 걸려있기 때문에 정면에서만 감상해야 하고 다양한 시점에서의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 작품들이 조각 작업이라고도 단정하기 어렵다. 마치 고대 유적들이나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돌덩어리에 조각된 얕은 부조들처럼, 이 작품은 일종의 « 촉각적인 » 시선을 부여하게 된다. 즉 마치 보는 이의 눈이 캔버스의 울퉁불퉁한 표면을 쓰다듬는 손이 된 것처럼, 재료의 거친 성질과 요철들을 포착할 수 있게 되는 지각, 그 독특한 지각으로부터 작품의 운율이 생겨난다.

둘째로, 배경과 형상 혹은 인물로 표현되는 구상 미술을 추구하는 대신, 주름진 천의 모티브로부터 시작된 과감한 추상 미술로 작업한다는 사실 또한 운율의 요소이다. 어떤 현실을 재현한 형상을 인지하는 과정은, 보는 이의 눈이 열린 감각으로 편견 없이 지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일단 눈이 이미지의 세계에서 학습된 기존의 지식을 떨쳐내면, 눈은 색채와 재료 속의 미묘한 뉘앙스, 즉 변화하는 색깔과 요동치는 질감에 더 주목하게 된다. 바로 이 작품에서처럼 말이다. 게다가 회화의 역사 어디서든 존재하는 기술인 주름진 천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 모티브를 사용하면서도, 추상성을 가지고 이 작품을 작업한다는 사실 역시 여기서 의미하는 운율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한다. 박인혁이 시각적 요소로 부여한 주름들은 흔히 구상 회화에서 볼 수 있는 꾸며내거나 가공된 것과는 다른 실제 주름이다. 그 주름들은 망막으로만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촉각으로 감각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작품의 운율은 그러므로 머릿속에서만 느껴지는 인상이 아니라 몸이 함께 느껴야 하는 감각적 경험이다.

마지막으로, 하양blancheur을 다루는 행위 또한 운율을 강조한다. 백색을 선택한 것은 우선 실용적인 관점에서 유효적절하다. 무엇보다 빛과 그림자의 작용을 더욱 강조해주기 때문이다. 백색은 주름진 천의 물결치는 듯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가장 잘 부각할 수 있는 섬세한 뉘앙스를 표현해준다. 또한, 의미적인 관점에서 백색은 침묵, 혹은 비어있음을 연상시킴으로써 평온의 유사어로 느껴지지만, 백색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주름이란 단어의 사전적 개념은 그러한 백색의 특성으로 연결된다. 주름은 어떤 물체가 자신에게로 몸을 굽힌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름은 주름을 포함하고 있으며, 더 정확히는 무수한 다른 주름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백색은 가능성으로 가득한 포화상태이며, 다른 것에의 유사성으로 넘치고 있고, 풍요의 동의어이며 모든 것을 품고 있다. 텅 빔과 가득 참의 사이를, 멈춤과 움직임의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박인혁의 백색은 운율 그 자체이다.

이 강력한 세 가지 행위로부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운율과 하양blancheur을 진정한 오브제로 사용하고 있는 박인혁의 이 새 연작은, 우리가 추상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작품도 가장 촉각적으로 생생한 실재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캔버스 표면 위의 이 물결치는 굴곡은 작가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작가의 존재는 만져질 듯 생생하다. 하나하나의 주름, 하나하나의 접합부들은 모두 작가가 직접 눌러서- 가끔은 온몸을 동원해가며 – 만든 흔적이기 때문이다. 천의 주름을 굳혀 가며 만든 이 작품은 작품과 작가의 육탄전의 결과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 작품의 운율에 대해 또 한 가지 측면의 감상을 가능하게 한다 – 이것은 안무이고, 춤이며, 혹은 격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동시에, 추상이라 불리는 이 모든 그림들의 감상은 보는 이의 실질적인 참여를 가정하고 있어서, 관객이 사물 표면의 외진 곳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감각을 동원하도록, 관객 자신의 신체성을 사용해 작품을 감상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렇게 운율로 가득한 재료의 찬가임에도 불구하고 박인혁의 그림들은 관객의 상상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미세한 굴곡까지도 어떤 낯선 세계를, 지리적 고저를, 예상치 못한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그림들은 그러므로 아직 더 쓰여야 할 미완성의 책 속의 빈 페이지와도 같다. 거기엔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지만, 우리가 담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들로 넘쳐흐르고 있다.

쥘리앵 베라그
평론가

2020년 9월